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탈린그라드 전투 (문단 편집) === 항공보급의 실패 === >"원수 각하,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군대의 보급을 위해 매일 몇 대의 비행기가 나가야 하는지 아십니까?" > >"내 개인적으로는 모른다." >---- > 육군 참모총장 쿠르트 자이츨러와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의 대화 소련군이 북부에서 진군하기 시작한 다음날인 11월 20일, 파울루스는 참모들과 함께 후퇴 방어선의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스탈린그라드에 가까운 굼라크 비행장의 제6군 사령부로 돌아가 거기서 방어전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무선으로 하달했다. 파울루스는 이에 따라 스탈린그라드 남부에 있는 병력을 빼내어 고슴도치 진지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 전술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서부에서 포위되었을 때 크게 위력을 발휘한 독일군의 전형적인 방어법이었다. 11월 23일 소련군의 포위로 25만여 명의 독일과 루마니아군 그리고 약간의 크로아티아 의용병 부대가 갇혀버렸다. 독일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 완전히 포위되자 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OKH]] 혹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행동의 자유'를 요청했다. 다시 말해 고슴도치 진지를 지킬 수 없을 시 스탈린그라드를 버리고 소련군 포위망을 돌파하는 허가를 요청했던 것이다.[* 파울루스가 철군을 요청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파울루스가 철군을 판단할 수 있던 가장 빠른 시점, 그러니깐 아무리 빨라도 23일 저녁에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 남쪽에 어떤 병력도 배치할 수 없었고, 그 시점에 이미 너덜너덜해진 6군을 전부 끌고 나오더라도 가장 빠른 시점인 25~26일에 이미 포위망은 닫힌 후이다. 결정적으로 파울루스는 철군을 요청한 바 없다.] B집단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는 철군을 주장했으나 이에 호응하거나 동쪽으로 진군할 B집단군의 잔여 병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둘의 의견을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미 6군이 포위된 상황에서 히틀러는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공중 보급으로 방어에 성공한 기억을 떠올리며 [[공군참모총장]] 한스 예쇼네크에게 성공적인 공중 보급 가능성에 대해 질문했다. 예쇼네크는 매우 단기간이라면 하루에 300톤 정도는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데미얀스크 포켓과 비교해서 스탈린그라드는 비행장과의 거리도 더 가까웠고 포위시기도 비슷했다. 그랬기에 실제로 300톤이 배달되었다면 상황이 실제처럼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데미얀스크에서 공군은 300톤이 넘는 물자를 수송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데미얀스크에 포위된 것 보다 적은 1개 군단을 보급하는데 충분한 규모였다. 반면 스탈린그라드에서 300톤은 6군이 버티기 위한 최소한이었고 루프트바페가 이를 달성해내는데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히틀러는 괴링에게 루프트바페가 해내지 못하면 6군은 끝장이라고 소리쳤다. 물론 직접 보급 작전을 담당하게 될 제4항공군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1차 대전 당시 독일군 최대 에이스인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동생이다. 독일군에서 항공 관련이라면 이 사람만큼 전문적인 인물은 없다시피 했다.]도 현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작전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무시당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미 6군은 포위된 상황이고 공중보급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뭐라도 보급하지 않는다면 그 외의 대안은 그들이 한겨울에 소련군 포위망 속에서 죽어가게 내비러 두는 것 뿐이었다. 후일 겨울폭풍 작전을 이끌게 될 만슈타인은 여전히 레닌그라드에서 열차를 타고 오는 길이었고 당장 포위를 뚫을 외부 병력은 전무했다. 6군이 초기에 자력으로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는 주장은 망상으로, 6군은 이미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으로 만신창이나 다름없었고 중화기를 끌고 갈 말조차도 거의 다 도살된 상태였으며 대다수의 병력이 북, 서, 동쪽에서 적군과 맞서고 있어 남측방에 배치할 병력을 구하는 것 자체가 난망한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우라누스 작전 일주일만에 돈 만곡부에서 독일 제 6군이 3개월간 간신히 전진한 영토를 순식간에 탈환하였다. 반면 독일 제6군은 시가전 뿐만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강한 소련군과도 지속적으로 교전하고 있었다. 이런 독일군이 우라누스 작전 개시와 동시에 기동 전력을 포위망 돌파에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판국에 돌파 시도는 엄밀히 말하자면 무질서한 패주에 불과했다. 모든 중화기와 전차를 버려둔 채 병력의 일부만을 데리고 간신히 빠져나오는 식의 탈주를 이 시점에 명령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데미얀스크의 사례에 비추어 최소한이나마 보급을 받으며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기다리는 편이 당시 독일군 사령부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2ep3t6t.jpg|width=100%]]}}} || || 스탈린그라드에 나타난 [[Ju 290]]과 [[Fw 200]][* 원래 수송 작전에는 주로 [[Ju 52]]가 동원되었으나, 상황이 다급해지자 독일은 당시 공군의 유일한 4발 수송기인 [[Ju 290]]을 보급 작전에 투입하고,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까지 희생시켜 가며 훈련이 부족한 승무원을 무선 장비와 항법 장비조차 설치되지 않은 수송기에 탑승시켜 수송 작전에 투입시켰다.] || 6군이 매일 필요로 하는 물자는 300~750톤에 달하는 데 반해 수송기, 활주로 등 모든 조건이 열악했던 독일 공군이 수송할 수 있는 물자는 최대 300톤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최상의 조건이 갖춰 졌을 때나 300톤의 수송이 가능했다.수송 작전에 동원된 Ju 52의 적재량은 1.5t~2t이었으므로 제6군을 유지하려면 일일 150번의 [[소티]]를 요했다. 통상적인 30~35%의 준비율을 감안하면 6군이 요하는 최대보급량인 750t를 수송하려면 1000대가 넘는 Ju 52가 필요했다. 그러나 공군이 보유한 Ju 52는 750대에 불과했고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튀니지[* 당시 횃불 작전으로 인한 롬멜 아프리카 군단 보급용.]와 데미얀스크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도합 500대의 수송기를 스탈린그라드에 동원할 수 있었고 이는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활약한 숫자와 엇비슷했다.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서 비행장과의 거리는 200~230km 정도였던 반면 데미얀스크 포켓에서는 250~260km였던 것을 감안하면 공군은 6군이 필요로 하는 최소치의 보급(300톤+@)을 실어 날랐어야 했다. 그런데도 독일 공군은 항공보급 기간 내내 보급량을 단 하루도 300톤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보다 정확히는, 100톤을 넘게 보급한 날의 비율이 간신히 40%를 넘는 수준이었다. 150~200톤을 보급한 날은 7일, 200톤을 넘긴 날은 4일에 불과했으며 목표치였던 300톤을 보급한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데미얀스크에서 82일 동안 14,455소티, 24,303톤을 보급한 공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71일 동안 고작 4,406소티, 6,536톤을 나르는 데 그쳤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소련이 데미얀스크 때와 다르게 가만히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련 공군]]은 고사포를 밀집시켜 방공 구역을 치밀하게 구축했고, 지상에서 관제하는 [[요격기]] 부대를 운용했다. 더하여 야간 전투기 부대를 투입하고, 시간에 관계없이 투입할 수 있는 별동대까지 편성했다. 결국 포위 내내 독일 공군은 소련 대공포 부대와 소련 공군에게 사정없이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은 676대의 [[Ju 52]]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했고, 전쟁 중후반기에 가서는 손실 보고에 대한 왜곡을 일삼던 독일 공군조차 266대의 손실을 인정했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 육군뿐만 아니라 독일 공군에게도 대참사였다. [[Bf 109]] 전투기들은 느린 [[Ju 52]] 수송기들과 전혀 발을 맞추지 못했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기 위해 역풍에 맞거나 기동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에너지 손실과 연료 소모로 인해 소련 공군 요격기들 습격에는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독일 수송기들 입장에서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반대로 애초 태생이 군용기였던 [[He 111]]은 수송 작전도 어느정도 잘 소화했다고 한다.] 그 결과 독일 공군은 데미얀스크에 비해 3~4배에 달하는 항공기를 상실하는 참담한 결과를 받아들었다. 물론 독일 공군도 바보는 아니라서 필사적으로 보급 작전을 성공시키려고 기를 썼다. [[Ju 52]]의 느린 속도와 부족한 수송량을 메꾸기 위해 Ju 86이나 [[He 111]]는 물론이고, 숫자도 많이 없던 [[Ju 290]], [[Fw 200]], 심지어는 [[He 177]]까지 싸그리 보급 임무에 동원되었다. 종국에는 He 111Z[* He 111의 주익을 이어붙여서 만든 파생형 항공기. Me 323나 기타 글라이더들을 견인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나 [[Me 323]] 기간트[* 이쪽은 수송능력이 무려 Ju 52의 10배가 넘는 12t이었기에 투입되었다면 확실히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나,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이미 전투기에게 터져나갔던 역사를 생각해보면 막상 투입되었어도 별로 활약하지 못하고 전부 격추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역시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비행장의 수용능력 문제로 전부 무산되었다. 특히 12월 23일 소련군 제24전차군단이 방어 수단이라고는 대전차포 몇 문이 전부인 타친스카야의 독일 공군 비행장을 공격함으로써 결정타를 날렸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소련군의 맹렬한 포격까지 더해지면서 독일 공군은 무려 72기의 Ju 52를 지상파괴로 잃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이로써 공중보급 역할을 해야할 공군 비행장이 모두 소련군에게 피해를 입음으로써 가뜩이나 부족한 보급이 더욱 줄어들었다.[* 타친스카야 비행장은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Ju 52의 주요 거점이었는데 여기가 공격당하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더 멀리 있는 비행장을 이용해야 했다. 이로 인해 수송기가 날아가는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연료를 더 실어야 했으므로 가뜩이나 부족한 수송량이 더 감소해 버렸다.] 이 때문에 비행장 방어를 위해서 제6장갑사단이 구출 부대에서 빠지고 말았고 이 영향으로 이후 구출 부대의 작전 또한 실패한다. 한편 전체적인 작전 진행의 어려움에 비하면 사소하지만 행정/기술적 착오 또한 6군의 병사들을 추위와 배고픔으로 이끌었다. 헤르만 괴링이 다스리던 공군은 특권을 이용하여 육군의 보급장교가 수송 물자를 체크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로 인해 대규모 물자들을 급히 싣고 나르다보니 6군에게 꼭 필요한 식량, 연료, 방한 물자들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병사들이 기껏 보급된 상자를 열어보면 신품 [[철모]]나 [[치약]]이 나오는 경우, 심지어는 그 상황에서 전혀 필요 없는 [[훈장]]이나[* 영화 [[스탈린그라드(1993)]]에서도 주인공 일행이 수송기에서 투하된 보급품을 열어보고서는 안에 있던 철십자 훈장은 죄다 옆으로 던져버리고 같이 들어간 전투식량 조금을 꺼내서 허겁지겁 취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콘돔]]까지 튀어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물자를 떨궜더니 병사들이 받지도 못하고 상자가 그대로 부셔져 버리거나 소련군의 손에 떨어지는 경우까지 있었다. 설상가상 이렇게 보급되는 물자의 상당수는 식량이 아니라 포위 당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쓸모도 없던 연료였다. 11월 23일 시작된 첫 항공 수송으로 첫 주동안 350톤의 물자를 날랐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6군은 정상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하루'''에 약 300톤의 물자가 필요했다. 참고로 일주일 동안 350톤을 날랐다면 하루에는 대략 50톤쯤 보냈다는 게 되는데 이는 필요한 양의 1/6밖에 되지 않는다.] 그중 식량은 14톤이었고 둘째 주에는 512톤을 날랐지만 식량은 24톤이었다.[*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2012), 412페이지] 포위된 인원이 29만 명에 가까웠다는 것[*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2012), 398페이지]을 생각하면 항공 수송으로 받은 식량은 1인당 1주일에 100g밖에 안 되는 극소량이어서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했다.[* 여담으로 이러한 공중 보급의 한계는 연합군도 똑같이 겪었는데 [[마켓 가든 작전]] 당시 고립된 [[영국군]]을 지원하게 위해 공중 보급이 시행되었고 사상자까지 발생하면서까지 이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보급 상자에서 나온 것은 [[베레모]]였다.] 그러나 제6군에서 실제로 식량 대신 연료와 탄약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식량 보급의 부족을 무조건 탓할 수는 없다. 포위 초반기 6군에게 필요한 것은 포위를 뚫기 위한 연료와 탄약이었지 식량은 후순위였으며 만슈타인의 겨울폭풍 작전이 무위로 돌아간 뒤에야 식량이 수송 항목의 메인으로 바뀐다. 파울루스는 포위망에 걸리고 한 달 뒤인 병사들에 대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대가 보유한 수송용 말의 도살을 허가했다.[* 당시 독일군에게 있어서 말은 물자 운반 및 인원 수송용으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기계화보병/기갑부대에서 방한대책으로 연료를 빼다 태우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나마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기갑 부대들은 고기는 커녕 주변의 다른 부대에서 말뼈다귀나 얻어 와서 스프나 끓여 먹는 신세였다. 게다가 이것도 며칠 못 갔고 이후 독일군은 계속 쫄쫄 굶게 되었다. 한번은 비행장 사수 등의 공을 세워 파울루스에게 [[철십자 훈장]]과 함께 특식을 받은 부대가 있었는데, 그 특식이란 게 고작 빵 한 덩이와 [[토마토 소스]] [[청어]] [[통조림]] 몇 통 뿐일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결국 굶주리다 못해 시체를 파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보급상황이 열악해지면서 보로포노보와 굼라크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3,500명의 소련군 포로들도 끔찍한 비극을 맞았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식량도 제공되지 않았고 크리스마스전에는 하루 평균 20명이던 사망률이 폭증하여 결국 1월 말 소련군 병사들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생존자는 단 20명 뿐이었다.[*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2012), 491페이지] 이들 포로들의 생존률은 고작 '''0.57%'''에 불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